essay

바이브 시대를 거슬러가기

무엇이든 흉내 내서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게 된 시대에, 그래도 지키고 싶은 것들에 대해.

YoojungYoojung·2026년 5월 13일
창가의 스탠딩 책상 — 터미널이 떠 있는 모니터와 랩탑, 기계식 키보드, 창밖의 나무들.

볕이 잘 드는 사무실을 구했다. 두 사람이 쓰기에는 다소 널찍한 공간이다. 쿠팡에서 산 스탠딩 책상을 세팅하고 집에 뒀던 여분의 모니터를 설치했다. 모니터 받침대는 두터운 책 두 권으로 갈음했다. 또각거리는 기계식 키보드와 트랙패드까지 갖춰두니 꽤나 그럴싸한 작업공간이 되었다.

매일 오전 아이스 커피를 한 잔 사들고 사무실로 향한다. 길 건너 탄천이 훤히 보이는 곳. 백팩에서 랩탑을 꺼내 모니터에 연결하고 터미널을 연다. 이제는 제법 엔지니어 흉내를 낼 수도 있게 되었다. 터미널을 열고 tmux로 클로드코드와 코덱스를 동시에 불러내본다. mkdir, cd, ls 같은 기초 터미널 명령어를 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효능감까지 느껴진다. 에이전트 프레임워크로 Pi가 좋다느니, Anthropic SDK를 써야 한다느니 Codex app server가 낫다느니 하는 식의 이야기도 그럴싸하게 늘어놓는다.

그뿐일까. 한편으로는 디자이너와 프론트엔드 엔지니어 그 사이 어디쯤의 흉내도 내본다. 이해할 수 없는 용어들과 싸우며, 얼기설기 엮어 누덕한 디자인 시스템도 만들고 스토리북도 퍼블리시 한다. 세상에, 내가 코드로 디자인 시스템을 만들었다니. 어깨가 절로 으쓱해진다.

디자인 시스템의 채팅 컴포넌트를 문서화한 스토리북 화면.

뭐든 될 수 있다. 뭐든 할 수도 있다. 그 무엇도 온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찌됐든 흉내를 내서, 그럴싸하게 만드는 게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내가 그 증인이 되었으니까. 결국 시간과 돈, 노력, 의지의 문제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일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그저 시늉으로만은 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사실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실은 여기서부터는 믿음과 취향, 철학의 영역이 된다. 요즘같이 혼란한 세상에서 내가 피하고 싶은 것은, 싫어하는 분명한 몇 가지는 이런 것들이다.

  • AI 도구 자체에 대한 도취와 맹신
  • 딸깍으로 그저 빠르기만 하면 된다는 믿음
  • 평균치를 밑도는 결과물에 대한 만족
  • 고민과 디테일이 없는 결과의 양산과 공유
  • 내 생각인줄 착각하도록 하는 ai-steered 결과물

결국 이것들은 몇 번의 클릭과 맞장구를 통해 LLM이 steering하게 두지 말자는 주장에 가깝다. 요즘은 LLM이 뱉어내는 그 확률적인, 평균치의 무난하고 의견없는 결과물들을 보자면 이유없이 기분이 나빠진다. 대신 계속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 오리지널리티
  • 고민과 의지
  • 디테일
  • 성의

이런 단어들이 LLM 사용과 배치되는 뉘앙스가 된다는 게 새삼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빠르게 달칵 한방에 다 된다고 말하는 게 시대정신인 세상에서 어쩌면 반대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목적을 모른채로 불안만을 해소하기 위해 납득할 수 없는 길을 좇을 수는 없다. 그런 방법도 잘 모른다는 게 더 솔직한 말일지도. 결국 마음이 이끄는대로 할 수밖에 없다. 늘 그게 나에게는 가장 맞는 방법이었고, 이번에도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